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예루살렘 공성전 ==== 3년, 교황의 성전 선포에 응답하여 집을 떠난 이후 길고 힘든 나날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근과 전염병, 탈영과 함께했던 기상천외한 [[십자군]]의 행군은 [[1099년]] [[6월 7일]]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파일:1099_Siege_of_Jerusalem.jpg|width=350]]|| || 예루살렘 공성전 || [[파티마 왕조]]는 [[청야 전술]]을 시전하여 성밖에 있던 식량을 전량 성내로 들이고 주변의 모든 우물들을 허물거나 독을 풀고 나무를 베어 없앴다. 중동의 혹독한 여름 날씨를 견디며 십자군은 성벽 주변에 캠프를 세웠다. 1년 전 안티오키아 공성전과 마찬가지로 거대 도시 공략을 위해 십자군은 포위대를 둘로 나누었다. 레몽은 성벽의 남쪽 부분에 진영을 세웠고 고드프루아와 탕크레드는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예루살렘에 도달한 군사는 1,300명의 기사와 12,000명의 보병이었는데 도시를 위협할 수 있는 충분한 군세였다. 하지만 상대의 파티마의 에미르 '이프티하르 아드 드왈라' 역시 이미 몇 개월 전부터 십자군의 도착이 임박한 것을 알고 있었으며, 앞서 설명 했듯이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된 뒤였다. 게다가 안티오키아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도시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군 도착 이전에 추방했으며 그들이 십자군의 식량을 축내게 만들었다. 청야 전술로 인하여 십자군은 보급을 위하여 상당한 거리(3~40km)를 이동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군의 포위가 미치지 못한 동, 서쪽으로 무슬림의 경기병을 기습적으로 출병시켜 길게 늘어진 보급로를 공격하게 했다. 이로써 십자군은 보급이 힘겨워졌고 또한 언제든지 이집트의 원군이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기에 최대한 빨리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 것이다. 목재가 없었기에 공성무기가 없는 공격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 사제가 꿈 속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 가보니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정말 동굴 속에 목재가 있었다.]] [[6월 13일]] 십자군은 목재를 이용해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데우스 볼트를 목청껏 외쳤지만 수비병들은 손 쉽게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 십자군은 목재가 확보될 때 까지 다시 성벽을 공격하지 않다가, 자파 항에 도달한 제노바와 영국 선박에서 목재를 확충한 뒤 3주간 양질의 공성무기를 제작하는데 열중했다. [[7월 13일]] 2번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공격이 진행되어 양측은 수많은 인명을 잃었지만 예루살렘은 견디어 냈다. 그날 밤에 고드프루아는 북부 공성탑을 물러나게 하여 방비가 허술해 보이던 북쪽의 꽃의 문으로 옮겼다. 전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에는 남쪽의 레몽의 공성탑이 파티마인들의 화계로 소실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북쪽에서 고드프루아가 선전하여 벽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성공적으로 꽃의 문을 열었다. ||<:>[[파일:godfrey_enters_jerusalem.jpg|width=350]]|| ||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고드프루아 (귀스타브 도레 作) || 십자군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가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남쪽 부분 무슬림 수비군이 어쩔 수 없이 시가전에 가세하여 수비의 공백이 생기자 레몽의 병사들은 오롯이 자신들의 노력으로만 성문을 돌파했다고 착각하며 진입했지만 이미 눈 앞에 고드프루아의 병사들이 주요 관공서와 성묘교회 같은 목 좋은 곳은 죄다 차지하며 사냥을 하고 있었다. 수 시간 만에 도시의 수비라인은 십자군에 와해되었고 봇물 터지듯 밀려들어간 십자군은 성안에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을 보이는 대로 도륙해 나갔다. 당시의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아시르는 이렇게 적었다. >성지의 주민들은 그들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프랑크인들은 1주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그들은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중략) 많은 이들이 죽었다. 프랑크인들은 유대인들을 그들의 [[유대교]] 회당에 몰아 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들은 또한 성스러운 유적들과 [[아브라함]]의 무덤을 파괴하였다. 한 십자군 병사도 이렇게 기록했다. >[[예루살렘]]의 큰 광장이나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온 시내에 발목 높이까지 차 흘러내렸다. 중세의 공성전에서 함락당한 도시를 약탈하고 유린하는 것은 보편화된 행위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학살의 규모는 당대의 인습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보여진다[* 출처: Montefiore, Simon Sebag. Jerusalem : the Biography. p.222.]. 예루살렘의 당시 [[파티마 왕조]] [[에미르]]였던 '이프티하르'는 [[#s-3.1|다윗의 탑]]으로 도망갔는데, 근처 서쪽의 야파 문에서 입성한 레몽에게 탑과 귀중품을 내놓는 조건으로 항복하고 [[아스칼론]]으로 도주했다. 어쨌든 주변 모든 마을에서 십자군을 피해 살고자 들어갔던 예루살렘은 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최후의 장소였던 것이다. 5주의 공성전 끝에 [[7월 15일]] 십자군은 성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우르바노 2세]]가 [[1095년]] [[11월 27일]] 십자군을 천명한 이래 [[1099년]] [[7월 15일]]까지 3년 7개월 만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